국내 프로야구 의 역사1 (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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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1981년
1960년대 후반부터 고교야구가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1970년대 고교야구는 준준결승부터 이미 매진이 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당시 대표적인 스타로 1971년 경북고의 남우식, 1976년 경남고의 최동원, 1978년 부산고의 양상문, 1980년 광주일고의 선동열, 선린상고의 박노준 등 매년 대스타들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1979년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기, 대통령배까지 총 4개 토너먼트 대회에 입장한 관객은 112만명에 달했다.
고교야구는 1982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 출범 후에도 한동안 프로야구 못지않게 인기 있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고교야구 보도 및 중계를 억지로 줄이면서 그 폭발적 인기를 일부러 눌러버릴 정도였다. 사실 프로야구도 프로축구처럼 리그 출범을 너무 급하게 추진했다는 점은 야구계에서도 공감한다. 프로축구가 고작 2프로팀과 3실업팀으로 리그를 만들고, 정상적인 연고밀착 운영을 하지 않았던 잘못이 있다면, 프로야구는 정상적인 고교야구의 인기를 억지로 죽여가면서 프로야구를 홍보했다는 과오가 있다는 것이다. 2006년에 재창간되었다가 1년도 못 가 폐간된 '월간 야구'지 컬럼도 프로야구의 출범시의 아쉬운 점으로 이 점을 언급할 정도였다.
고교야구의 인기와는 별개로 1970년대 중반 야구의 프로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표면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인 홍윤희가 한국을 방문하여 야구협회 관계자, 감독들을 규합하면서 프로야구 창설에 대한 의견을 타진했고,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자 미국에서 약 20만 달러의 프로화 비용을 마련하여 재입국, 프로야구 창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며 리그 운영계획서 등을 작성하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되었다.당시 대한야구협회 김종락 회장은 프로 출범에 찬성하는 입장 이었지만 다른 야구협회 이사진들이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며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시 경제개발에 올인하면서 국민들을 옥죄던 유신 정권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프로화 움직임은 좌초되고 홍윤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어서, 이때 홍윤희를 중심으로 논의했던 계획안은 수 년 뒤 고스란히 한국 프로야구 리그 창설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독재정권인 제5공화국이 출범한 직후인 19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로 프로 스포츠 창설의 논의가 이루어졌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명분은 국민정서와 여가선용을 위함이지만 실제로는 3S정책의 일환이었다. 특히 경남고 출신으로 정권의 실세였던 이학봉 민정수석 부서관은 그 전에도 사석에서 프로야구창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박영길 전 감독이 전했다. 하지만 여가선용이란 말이 꼭 명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별 다른 여가가 없던 당시 국민들의 가장 큰 여흥거리가 바로 정치 얘기였기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도 건전한 여가거리를 제공할 필요성은 있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건 틀어막았지만 대학에서 한창 최루탄 맞고 화염병 던져봤던 이들이 회사원이 되면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지는 뻔한 일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논란을 다 논외로 한다고 쳐도 그 당시에 가족 단위로 즐길만한 여가거리가 정말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야구는 이미 프로화를 위한 기반을 민간 차원에서 갖춰놓았으므로, 전두환 정부가 정치적 이유에서 야구의 프로화를 추진하자 MBC의 역할과 의지 및 국민들의 호응이 겹쳐 성공적으로 프로리그가 열렸다.
그리하여 이상주 교육문화비서관이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에 프로화 검토를 의뢰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축구계에서도 프로화를 추진하였는데 축구협회에서는 운동장 야간조명 설치 등을 이유로 139억의 막대한 정부 도움이 필요하다고 정부에게 보고를 올렸다. 반면, 야구협회 전무를 지낸 이용일과 운영부장 출신 이호헌이 주도하여 수립한 야구 프로화 계획서는 정부의 지원금 한푼 없이도 프로화가 가능하다는 골자의 내용이 있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서 우선 프로야구 부터 출범시키기로 낙착을 지었다.
정부 보조가 없는 방법 이라는 것은 바로 대기업 들이 야구단을 하나씩 맡도록 한 것이다. 지금 KBO 팬들 입장에서는 기업이 구단 맡는 게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당시 구기종목 최초의 프로구단인 할렐루야 독수리만 해도 기업구단이 아니었다. 스스로 프로에 참여한 기업도 있었고 반 강제적으로 시작한 기업도 있었다. 물론 정착을 위해 야구단을 만든 기업들에게 운영 및 세무 면에서 혜택을 주기는 했다.
고교야구는 1982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 출범 후에도 한동안 프로야구 못지않게 인기 있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고교야구 보도 및 중계를 억지로 줄이면서 그 폭발적 인기를 일부러 눌러버릴 정도였다. 사실 프로야구도 프로축구처럼 리그 출범을 너무 급하게 추진했다는 점은 야구계에서도 공감한다. 프로축구가 고작 2프로팀과 3실업팀으로 리그를 만들고, 정상적인 연고밀착 운영을 하지 않았던 잘못이 있다면, 프로야구는 정상적인 고교야구의 인기를 억지로 죽여가면서 프로야구를 홍보했다는 과오가 있다는 것이다. 2006년에 재창간되었다가 1년도 못 가 폐간된 '월간 야구'지 컬럼도 프로야구의 출범시의 아쉬운 점으로 이 점을 언급할 정도였다.
고교야구의 인기와는 별개로 1970년대 중반 야구의 프로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표면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인 홍윤희가 한국을 방문하여 야구협회 관계자, 감독들을 규합하면서 프로야구 창설에 대한 의견을 타진했고,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자 미국에서 약 20만 달러의 프로화 비용을 마련하여 재입국, 프로야구 창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며 리그 운영계획서 등을 작성하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되었다.당시 대한야구협회 김종락 회장은 프로 출범에 찬성하는 입장 이었지만 다른 야구협회 이사진들이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며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시 경제개발에 올인하면서 국민들을 옥죄던 유신 정권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프로화 움직임은 좌초되고 홍윤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어서, 이때 홍윤희를 중심으로 논의했던 계획안은 수 년 뒤 고스란히 한국 프로야구 리그 창설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독재정권인 제5공화국이 출범한 직후인 19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로 프로 스포츠 창설의 논의가 이루어졌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명분은 국민정서와 여가선용을 위함이지만 실제로는 3S정책의 일환이었다. 특히 경남고 출신으로 정권의 실세였던 이학봉 민정수석 부서관은 그 전에도 사석에서 프로야구창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박영길 전 감독이 전했다. 하지만 여가선용이란 말이 꼭 명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별 다른 여가가 없던 당시 국민들의 가장 큰 여흥거리가 바로 정치 얘기였기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도 건전한 여가거리를 제공할 필요성은 있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건 틀어막았지만 대학에서 한창 최루탄 맞고 화염병 던져봤던 이들이 회사원이 되면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지는 뻔한 일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논란을 다 논외로 한다고 쳐도 그 당시에 가족 단위로 즐길만한 여가거리가 정말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야구는 이미 프로화를 위한 기반을 민간 차원에서 갖춰놓았으므로, 전두환 정부가 정치적 이유에서 야구의 프로화를 추진하자 MBC의 역할과 의지 및 국민들의 호응이 겹쳐 성공적으로 프로리그가 열렸다.
그리하여 이상주 교육문화비서관이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에 프로화 검토를 의뢰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축구계에서도 프로화를 추진하였는데 축구협회에서는 운동장 야간조명 설치 등을 이유로 139억의 막대한 정부 도움이 필요하다고 정부에게 보고를 올렸다. 반면, 야구협회 전무를 지낸 이용일과 운영부장 출신 이호헌이 주도하여 수립한 야구 프로화 계획서는 정부의 지원금 한푼 없이도 프로화가 가능하다는 골자의 내용이 있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서 우선 프로야구 부터 출범시키기로 낙착을 지었다.
정부 보조가 없는 방법 이라는 것은 바로 대기업 들이 야구단을 하나씩 맡도록 한 것이다. 지금 KBO 팬들 입장에서는 기업이 구단 맡는 게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당시 구기종목 최초의 프로구단인 할렐루야 독수리만 해도 기업구단이 아니었다. 스스로 프로에 참여한 기업도 있었고 반 강제적으로 시작한 기업도 있었다. 물론 정착을 위해 야구단을 만든 기업들에게 운영 및 세무 면에서 혜택을 주기는 했다.
1순위 기업을 우선적으로 접촉하고 불가능할시 2순위 기업에 접촉하기 위해 1, 2순위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청와대 보고 이전 이용일, 이호헌의 계획안의 기업들은 사뭇 달랐는데 아래와 같다.
흥미롭게도 청와대 보고 이전 이용일, 이호헌의 계획안의 기업들은 사뭇 달랐는데 아래와 같다.
1순위
서울특별시 - 롯데 자이언트: 이호헌과 한국프로야구를 계획했고 주도했던 이용일 前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실업야구 최강이었던 "롯데 자이언트"가 서울에 오는 것이 프로야구 흥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일본에서 이미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어 프로 구단 운영 능력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었다고 한다.부산,경남 - 럭키금성그룹: 바로 LG트윈스 의 모기업이다. 창업주 구씨 일가의 고향이 경남 진주였고 럭키금성의 뿌리인 럭키가 부산에서 창업했기 때문에 부산·경남 연고 1순위 기업으로 거론되었다. 실제로 럭키금성은 프로야구에 뛰어들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출범 논의 단계에서 그룹 고위층은 해외에 있어서 제대로 접촉을 못했다. 당시 구자경 회장이 귀국하여 자초지종을 듣고 프로야구 출범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여하튼 출범준비를 하면서 럭키금성을 데려올 수 있다고 믿었기에, 나중에 롯데가 서울을 내놓으라고 나오자 '롯데를 대신해서 부산 경남을 대신 줄 그룹은 얼마든지 있다'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다.
대구,경북 -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현 삼성그룹의 모태이자 최초 설립회사인 삼성상회를 대구에서 창업하였고 구미,경산 등지에 제일모직과 삼성전자 등의 생산 공장이 밀집했던 연고와 더불어 프로야구 출범 당시 대구경북 지역야구는 극강 수준으로 거의 대표팀급이었기에 삼성 특유의 1등주의 또한 발동하여 대구·경북을 연고로 프로야구에 참여하는 것을 최초로 확정 지었다.
인천,경기,강원 - 현대그룹: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 강원도 통천이고 젊은 시절 인천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서울 올림픽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연감의 내용에서는 전 대통령이자 당시 현대건설의 이명박 사장이 1988 서울 올림픽에 전력투구해야 하여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한다.
전라도 - 삼양사: 호남권이 경제개발에서 소외되었기에 지역 연고 기업 중에 뚜렷한 대기업이 없었다. 그나마 거론된 게 식품업체 삼양사와 고속버스업체 광주고속, 보험회사인 교보생명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하면 명백하게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었다. 이후 2007년에 스포츠 2.0과 가진 인터뷰에서 삼양사가 "아무리 전두환이가 시키는 거라지만 우리가 무슨 스포츠냐"라며 난색을 표했고 자신들의 먼 친척이 운영하는 동아일보에 제안서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측에서도 거절하며 파토날 뻔 했는데 해태그룹의 참여로 6개구단이 참가할수 있었다고. 고속 경제성장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호남권이라서 지역 연고 기업들도 몇 개 없었고, 그나마 규모가 있는 기업들이 모조리 외면했기에 심지어 호남지역 관가에서는 전남도민구단 이야기까지 나왔었다고 한다.
충청도 - 동아건설: 창업주 최문준 명예회장의 고향이 대전으로 동아건설도 충남토건으로 창업했다가 훗날 이름을 바꾼 것이다.
2순위
서울특별시 - 대우그룹: 창업주 김우중 회장은 대구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이사와서 초교-중학-고교-대학을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축빠인지라 프로야구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프로축구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부산에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를 창단했다.부산·경남 - 럭키그룹
대구·경북 - 포항제철: 당시 포항제철은 한국실업야구의 명문팀이었던 포항제철 야구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박태준 회장 역시 열렬한 축빠여서 야구단을 창단하지 않고 포철 축구단을 프로팀으로 전환시켰다.
인천·경기·강원 - 대한항공: 대한항공이 속한 한진그룹의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고향이 인천으로, 해방 직후 조중훈이 인천 선린동에서 트럭 1대로 한진상사를 차린게 한진그룹의 시작이었다.
전라도 - 금호그룹 or 해태제과 or 미원
충청도 - 한국화약그룹: 창업주 김종희 회장의 고향이 충남 천안이며 이미 천안북일고등학교 야구부도 지원해왔다. 결과론이지만 창단 과정에서 한국화약과의 접촉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프로야구 출범이 준비 중이던 1981년 7월 김종희 회장이 지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프로야구단을 만들 경황이 없었다. 당시 충청권은 연고기업이 없어서 창업주 고향이 경기도 광주인 두산그룹의 참여를 종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만약 김종희 회장이 건강한 상태에서 한국화약에 먼저 접촉했다면 두산은 참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특이 케이스인 MBC를 비롯해 청와대 비서실과의 조율을 통해 실제 확정된 보고서는 위에 언급한대로다. 하지만 무려 절반의 연고지가 계획안과는 다르게 바뀌게 되었다.
처음의 연고지안부터 최종안까지 공통점으로는 그룹 오너의 고향지역이거나 그룹이 위치한곳 혹은 처음 시작한곳 같은 각 그룹에 있어 중요한 지역을 맡긴다는 원칙을 내세워 계획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룹 회장들의 애향심을 이용하려던 것이다. 이렇게 염두에 두었지만, MBC와 삼성그룹,롯데그룹을 제외하고는 연고권 문제와 프로야구라는 생소한 사업에 진출한다는 불안함과 부담감을 표출하며 대부분 고사하는 걸로 인해 출범은 어려움을 맞았다.
삼미의 참여는 결과적으로 기적이라고 묘사되지만, 어쩌면 결과론일지도 모른다. 현대가 경기 연고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게 된 두산이 경기 연고를 요구했다는 것은 본문에 나오는데, 이걸 막은 것은 이용일 등 KBO에 충청권에 참여할 기업이 마땅치 않아서 두산에게 충청권을 맡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2안에서는 충청권 연고의 기업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한국화약이다. 실제로 한국화약도 오너 일가가 야구 팬들이었기 때문에 만일 제의했으면 받았을 것이란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하지만 출범 당시 한국화약의 상황 상 김종희 회장이 후계자를 정해두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사망하였고 이 때문에 김승연,김호연 형제간에 재산분쟁이 터진 상황이었다. 결국 어느 정도 정리된 후 프로야구에 뛰어드는데 그 팀이 빙그레 이글스. 만일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빙그레는 원년 기업일 수도 있었고, 두산이 인천 연고 구단으로 출발했다면 인천 연고 구단의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론적 이야기다. 인천야구의 문제점은 단순히 모기업 클래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인천은 서울 위성도시의 성격을 털어내지 못하고 권역 거점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했다는 데 진짜 문제가 있다. 인천-경기권이라고 하지만 경기도 내에서 인천을 중심 도시라고 여기는 지역은 단 한 곳도 없다. 그리고 인천의 도시 구조 자체가 명확한 중심을 가지지 못하고 이후의 성장도 저마다 중구난방식으로 서울과 직접 연결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것도 문제. 수원의 경우 경기 남부의 확실한 거점 도시지만 규모가 문제였다.
충청, 인천·경기·강원권과 더불어 연고 기업의 물색에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은 호남이었다. 호남지역 연고 기업으로 금호측에 제의를 했지만, 금호그룹 입장에서는 광주고속을 빼곤 당시에 내세울 만한 소비재 계열사가 없었고, 기업 지원 방침도 예술 쪽에 비중을 좀 더 두고 있기도 해서 스포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목상으로는 오너인 박인천 회장은 아들들이 자기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나가리'시켰다. 이상주 수석의 이야기는 이와는 다른데, 언론에 금호가 거론되자 박성용 부회장이 직접 찾아와서 노조와의 분쟁으로 골치가 아픈 데다 적자까지 겹쳐 정신 차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 기업을 우선 살려 놓고 봐야 한다며 프로야구 참여를 거절했다고 한다. 금호가 거절한 다음 호남 연고 기업으로 접촉한 곳은 대한교육보험 이었다. 대한교육보험 자체는 호남 지역과 연고는 없으나 설립자인 신용호 회장의 고향이 전남 영암이었다. 그러나 대한교육보험 역시 프로야구 참여를 거절했다.
이 때 프로야구 창단 소식을 들은 박건배 해태제과 사장이 프로야구 준비위에 전화를 해서 "호남지역 창단을 우리가 하면 안 되느냐"고 나서게 되었다. 사실 해태는 기업 규모가 작아서 프로야구단 창단 기업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호남 연고로 후보에 있던 기업들이 줄줄이 고사하던 상황에서 해태가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요컨대 알려진 것처럼 해태 회장을 청와대에 불러 협박한 것이 아니라, 박건배 회장이 야구를 좋아해 직접 나서 야구팀이 생긴 셈. 사실 삼미 슈퍼스타즈, 쌍방울 레이더스, NC다이노스, SSG랜더스처럼 한국프로야구 팀의 확장은 야빠 사업가들의 공이 컸다.
다만 이 부분에는 이견이 있는데 해태의 초대 감독이자 당시 유명 야구인인 김동엽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김동엽이 MBC의 프로야구 창설 계획 극초창기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후에 광주지역을 맡을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본인의 연줄을 이용 해태를 청와대에 추천했다. 그리고 청와대에서는 김동엽과 박건배 회장을 부르는데 이 자리에서 정부는 프로야구 참여를 권유한다. 이때 박건배 사장이 정부 인사 앞에서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참여를 결정했다는 것이 김동연이 1995년에 쓴 자서전 <그래, 짤라라 짤라>에 나온 내용이다. 본인이 청와대에 연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 달라는 부분은 1983년 프로야구 연감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문제는 해태가 프로야구 창단에 끼어들자 롯데가 반발했는데, 이는 프로야구 창단 당시 동종업계 회사는 참여를 배제 시킨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룰이 생긴 이유는, 당시 기업들이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유는 다름 아닌 기업 홍보 효과였는데, 동종산업의 기업들이 야구에서 경쟁한다면 광고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롯데 입장에선 제과 업계 라이벌인 해태가 갑자기 들어온다고 하니 펄펄 뛰었던 것이다.
더구나 두산그룹의 서울연고권과 겹치면서 문제가 더 심화된다. OB는 대전·충청권과는 연고가 없었던 데다 대전·충청권의 선수층은 두터운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OB는 서울을 요구했었다. 그러다가 현대가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포기하고 삼미가 들어서자, 이번에는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창업주 박승직이 경기동 광주 출신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게다가 두산그룹 역사의 시작은 현재의 서울 두산타워 건물 위치이기도 한 청계천 인근에서 이루어졌다. 연고 요건으로 따지면 이 부분이 더 당위성이 있고 적합했지만 결국 이 두 가지 요청은 구단주 회의에서 모두 거부되었다.
이렇게 OB가 서울 연고를 주장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롯데는 해태 참가의 거부와 롯데의 서울 연고를 주장하고 나섰다. 롯데는 유일하게 실업야구팀 롯데 자이언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시 실업야구는 지역 연고가 없었고 대부분의 경기가 서울에서 열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팀이 서울에서 운영되고 있었고 롯데 자이언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시 롯데그룹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롯데자이언트 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요미우리 자이언츠 처럼 수도권이 아니면 흥행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운영 중이었던 실업야구팀 이름을 자이언트라고 지은 이유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뒤늦게 해태가 참여하게 된 것도 문제였다. 동종 산업에 있는 회사는 프로야구에 넣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는데 해태가 들어오면서 제과업계 라이벌 구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 좋은 구실이 되었다. 게다가 롯데는 무슨 배짱인지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서울로 가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의 근자감을 부리기도 했다.
서울 연고를 주장하는 팀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재안이 나왔는데, 우선 롯데는 힘으로 눌렀다. KBO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럭키그룹이었다. 2015년 현재 롯데그룹의 재벌 순위는 5위로 4위 LG를 턱 밑까지 쫓아온 상태이지만, 1980년대 초반 롯데는 재계순위 10위권 안팎을 들락거리던 수준으로, 1980~90년대 꾸준히 재계순위 3~5위권에 있던 럭키금성보다 재계순위가 낮았다. 더구나 당시의 LG는 지금의 GS그룹, LIG그룹, LS그룹 등이 분사되기 전이다. 그런 상황에서 롯데가 서울로 가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의 당랑거철을 행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
이후에 밝혀지듯이 럭키그룹도 분명히 프로야구 참여 의사는 갖고 있었다. 다만 하필이면 그룹 오너이던 구자경 회장이 당시 해외 출장을 나갔는지라 프로야구 참여 여부에 대한 확답을 내지 못했고, 아무튼 KBO는 럭키그룹이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롯데)당신들 아니더라도 창단 후보는 얼마든지 있다" 라며 롯데를 압박할 수 있었다. 당시 출장 중이던 구자경 회장 대신 이헌조 그룹 기획조정실장이 부산 연고 프로팀 창단 제의를 받고 "지금 오너가 부재중이니 돌아오신 후에 협의 후 확답하겠다" 라며 답변을 미뤘지만 결국 더 이상의 객기를 부릴 여력이 없었던 롯데는 조건 없이 부산 연고를 받아들임으로서 무산되었다. 이후 구 회장이 귀국하여 그런 일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자 무릎을 치며 "이 문디야, 그냥 하겠다고 받아 들였어야 안카나!" 라며 이 실장을 눈물이 빠질 정도로 호되게 나무랐다고 한다. 사실 기업 내 실무진 입장에서는 구단 창단과 같은 막대한 경비가 소요될 안건을 오너의 확실한 재가도 없이 받아 들였다가는 월권 내지는 하극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중대한 일임에 틀림 없지만, 이 실장이 원칙적으로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이 그를 질책한 것으로 보면 상당히 아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프로야구의 구조는 구단주 회의로 대표되는 재벌들의 카르텔 수준인지라, 한번 때를 놓치면 마음대로 참여할 수도 없다. 그래서 LG가 MBC를 인수한 다음에나 참여가 가능했고, 현대는 타 구단들이 전부 대놓고 반대하는 바람에 현대피닉스 를 통해서 외부 전쟁 비슷하게 가다가 태평양 돌핀스 를 인수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MBC는 상황이 좀 달랐는데, 애초에 MBC에게 서울을 준 이유 자체가 홍보를 해 달라는 것과, "비서실과는 별도로 프로야구 창설을 기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서울로 정해져있었고 심지어 이진희 사장이 내심 총재를 노리기까지 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팀들이 OB는 3년간 대전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다는 공증문서에 도장을 찍을 때 MBC가 서울연고를 나눌 수 없다고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이상주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이학봉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이 이진희 MBC 사장을 겨냥해서 압박한 것이다. 특히 이학봉 민정수석은 전두환 정권의 실세였는데 창립총회 전날 결국 윽박을 질러서 MBC 이진희 사장에게 도장을 받아냈다. 사실 전두환은 MBC를 뺄 것이냐 말 것이냐도 잠깐 고민한 장면이 있다. MBC가 친정부 언론이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MBC에 힘을 실어줄지도 모른다는 것이 싫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여차하면 프로야구를 때려치울 수도 있다는 협박까지 굴러다닌 끝에 MBC도 굴복을 하게 된다. 서울은 MBC와 두산의 공동 연고로 하고, 두산은 3년간 대전에 있다가 올라오며, 이 동안 드래프트는 MBC와 두산이 2:1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원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MBC는 김재박과 이해창을, OB는 박철순을 각각 지명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당시 신군부 세력을 포함한 정치권의 연줄 등을 총동원하여 협상을 한 결과, 광주에 해태그룹이, 두산그룹이 연고지인 충청도에 선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3년후 서울연고 이전을 약속받고 충청권에 들어왔다. 그리고 창립총회 직전 거의 기적적으로 삼미그룹이 인천직할시 연고기업으로 프로야구 참여를 확정지었다.
이상이 기존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정설이었다. KBO에서 1983년 발간한 연감 에서도 위와 비슷하게 창설 과정을 설명했고 과거 유명 야구 기자인 홍순일 기자 역시 같은 내용을 연속 기고하기도 했다.
다만 어느 자료를 참고하더라도 MBC의 참가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것은 같았는데, 이후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공개 되었고 그것이 아래의 내용이다. 실제로는 당시 MBC사장이었던 이진희 사장이 "'MBC만 프로야구팀을 만드는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4팀이 참여하는 리그를 구상하라'"고 지시를 내려 MBC TF팀에서 그걸 기획한 다음 이진희 사장에게 보고하고, 이진희 사장이 그걸 청와대에 들어가 전두환에게 보고했는데 전두환이 깜짝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상이 기존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정설이었다. KBO에서 1983년 발간한 연감 에서도 위와 비슷하게 창설 과정을 설명했고 과거 유명 야구 기자인 홍순일 기자 역시 같은 내용을 연속 기고하기도 했다.
다만 어느 자료를 참고하더라도 MBC의 참가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것은 같았는데, 이후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공개 되었고 그것이 아래의 내용이다. 실제로는 당시 MBC사장이었던 이진희 사장이 "'MBC만 프로야구팀을 만드는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4팀이 참여하는 리그를 구상하라'"고 지시를 내려 MBC TF팀에서 그걸 기획한 다음 이진희 사장에게 보고하고, 이진희 사장이 그걸 청와대에 들어가 전두환에게 보고했는데 전두환이 깜짝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 뒤에 전두환이 한 이야기가 "난 프로축구인 줄 알았지". 사실 전두환은 과거 육군사관학교 시절 골키퍼 출신일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다. 그래서 축구때문에 전두환과 인연이 된 연예인들도 제법 많은 편. 박종환 감독이 다른 건 집어치고 축구에 관해서만은 전두환을 존경한다고 말한 것도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다만 MBC의 참가와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었다는 언급과는 달리 프로야구 출범 직전 1981년 말 기사를 보면 문화방송에서 프로야구를 주도했으며 서울연고를 확정했다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김재박이 실업야구 8관왕이었으나 현재는 7관왕이라 불리는 것 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 기사가 잊히는 과정에서 MBC의 역할이 묻힌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대 기사를 찾아보면 문화방송에서 시작한 단일팀 기획이나 프로원년 6개팀 구상 모두 MBC의 주도로 보도되고 있다.
즉, 프로야구는 대중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전두환이 기획하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과 MBC라는 두 곳에서 동시에 시작된 별개의 기획이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져 형태를 갖추고 출범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자의 경우도 청와대 비서관들 선에서 논의가 나오고 야구계와 접촉해 진행을 한 것이지 전두환이 직접적으로 프로야구 창설을 지시했다는 증언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정부가 개입을 하긴 했는데, 이건 주도를 한 것이 아니라 연고지등의 조정 등에 관련한 것이었다.
당시 정부가 프로야구를 3S정책 에 이용하려 하기는 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마침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우승한 상황이라 야구 쪽으로 시선이 쏠려있었기에 시기 적절한 상황이긴 했다. 지역연고 역시 윗 각주에서 보듯이 지역감정 조장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용일의 아이디어로, 되려 5공은 초기에 지역감정 심화를 우려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1년뒤에 시작한 K리그는 각 팀에게 권역을 나눠주긴 했지만 전국 순회 경기를 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연고지와 홈원정 경기를 바탕으로 한 리그 운영을 하지 않아서 초창기 충성도 높은 팬을 못만들었고, 1987년부터 지역연고제를 도입했지만 이미 프로야구와는 격차가 상당히 벌어진 상태인데다가 그나마도 연맹 사무국의 부재 구단들이 각자 사업 거점으로 옮겨가며 각자도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미 각 지역별 대도시를 중심으로 두터운 지역 연고 팬층을 형성한 프로야구와 지역 연고 정착에 뒤늦게 뛰어든 프로축구의 격차는 넘사벽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프로축구의 지역연고 부재는 단순히 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KBO리그가 원년부터 지역밀착 속에 흥행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고교야구라는 강력한 지역기반 컨텐츠가 성업중이었고, 그 기반을 적절히 승계, 활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야구는 국가대항전이 거의 없이 고교야구 등 국내 컨텐츠를 소비하는 형태로 발전하면서 프로야구 출범을 위한 토대가 착착 쌓인 반면, 축구는 국가대표인 화랑팀이 매년 국가대표 및 클럽팀을 상대로 수십경기를 치르고 수십일씩 전지훈련을 떠나는 등 사실상 국영클럽화되다보니 국내 컨텐츠가 성장할 공간이 없었다. 당장 지역별로 명문 고교야구팀과 고교축구팀, 주요 고교야구 대회와 고교축구 대회의 인지도만 생각해봐도 쉽게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다만 MBC의 참가와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었다는 언급과는 달리 프로야구 출범 직전 1981년 말 기사를 보면 문화방송에서 프로야구를 주도했으며 서울연고를 확정했다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김재박이 실업야구 8관왕이었으나 현재는 7관왕이라 불리는 것 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 기사가 잊히는 과정에서 MBC의 역할이 묻힌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대 기사를 찾아보면 문화방송에서 시작한 단일팀 기획이나 프로원년 6개팀 구상 모두 MBC의 주도로 보도되고 있다.
즉, 프로야구는 대중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전두환이 기획하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과 MBC라는 두 곳에서 동시에 시작된 별개의 기획이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져 형태를 갖추고 출범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자의 경우도 청와대 비서관들 선에서 논의가 나오고 야구계와 접촉해 진행을 한 것이지 전두환이 직접적으로 프로야구 창설을 지시했다는 증언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정부가 개입을 하긴 했는데, 이건 주도를 한 것이 아니라 연고지등의 조정 등에 관련한 것이었다.
당시 정부가 프로야구를 3S정책 에 이용하려 하기는 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마침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우승한 상황이라 야구 쪽으로 시선이 쏠려있었기에 시기 적절한 상황이긴 했다. 지역연고 역시 윗 각주에서 보듯이 지역감정 조장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용일의 아이디어로, 되려 5공은 초기에 지역감정 심화를 우려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1년뒤에 시작한 K리그는 각 팀에게 권역을 나눠주긴 했지만 전국 순회 경기를 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연고지와 홈원정 경기를 바탕으로 한 리그 운영을 하지 않아서 초창기 충성도 높은 팬을 못만들었고, 1987년부터 지역연고제를 도입했지만 이미 프로야구와는 격차가 상당히 벌어진 상태인데다가 그나마도 연맹 사무국의 부재 구단들이 각자 사업 거점으로 옮겨가며 각자도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미 각 지역별 대도시를 중심으로 두터운 지역 연고 팬층을 형성한 프로야구와 지역 연고 정착에 뒤늦게 뛰어든 프로축구의 격차는 넘사벽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프로축구의 지역연고 부재는 단순히 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KBO리그가 원년부터 지역밀착 속에 흥행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고교야구라는 강력한 지역기반 컨텐츠가 성업중이었고, 그 기반을 적절히 승계, 활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야구는 국가대항전이 거의 없이 고교야구 등 국내 컨텐츠를 소비하는 형태로 발전하면서 프로야구 출범을 위한 토대가 착착 쌓인 반면, 축구는 국가대표인 화랑팀이 매년 국가대표 및 클럽팀을 상대로 수십경기를 치르고 수십일씩 전지훈련을 떠나는 등 사실상 국영클럽화되다보니 국내 컨텐츠가 성장할 공간이 없었다. 당장 지역별로 명문 고교야구팀과 고교축구팀, 주요 고교야구 대회와 고교축구 대회의 인지도만 생각해봐도 쉽게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정부는 쿠데타로 인해 독재정부로 세워졌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어 대놓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뉘앙스를 띄면 정권 유지에 지장이 생긴다. 실제 해태가 예상과 달리 강세를 띄면서 삼성과 영호남 대립 구도를 형성하자 당시 5공 정권은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다. 해태를 중심으로 호남인들이 결집해서 정치적인 행동을 할까봐 우려했던 정권은 매년 5월 중순이면 518광주민주화운동 과 관련한 이유로 인해 해태는 원정 경기만 다니도록 외부압력을 가했다. 5월18일 이나 그 즈음 광주에서 홈 경기를 하면 야구장에 모였던 관중들이 시위 군중으로 돌변할까봐 우려해서 내건 조치였다. 그 정도로 광주 민심은 5공 내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5공은 심지어 프로야구가 다 자리를 잡은 1984년에 느닷없이 프로야구의 전국순회경기를 추진하기도 했다. 지금은 보편화된 중소도시 제2구장도 원래 이 전국순회경기 구상의 일환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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